
지은이 : 윤삼현 / 그린이 : 김천정 / 가격 : 15,000원
목차
서사시를 쓰며
4·19 서사동시를 쓰게 된 것은 오롯이 형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1960년 4월 19일, 독재의 총탄에 형을 잃었다.
그 날 가족과 온 친척들, 온 마을이 충격과 비통에 잠겼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형의 죽음에 뚜렷이 다가갈 수 없었다.
어른들이 땅을 치며 울부짖는 걸 보고 막연한 슬픔이 피부에 스며드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 내게 변화가 왔다.
형의 죽음을 겪은 뒤 밥맛이 떨어졌다. 밥알이 씹히지 않았다. 찐득하고 비릿한 혈액의 냄새가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떨어져 버린 꽃잎 하나 가뿐 숨을 쉬다가 고개를 떨구는 장면이 자맥질처럼 눈앞에 되풀이되곤 했다.
꽃잎은 형이었다. 영영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나볼 수 없는 형. 형은 이 세상을 떠나 또 다른 어떤 세계로 떠나갔을까?
형의 빈자리가 텅 빈 쓸쓸함으로 다가왔다.
그 느낌은 높은 벼랑에서 뚝 떨어지는 꿈을 꾸던 밤의 공포에 견줄 만큼 아찔했다.
두려움과 절망감이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어질머리를 맛보게 했다.
이기붕 국회의장 관저 앞, 선두에서 형은 시위를 벌였다.
시위 물결은 금방이라도 경찰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의장 관저를 덮칠 태세였다.
그리고 4월 19일 오후 4시경, 형은 경찰이 발포한 총탄 네 발을 가슴에 맞았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을 거둔 뒤였다.
철쭉 핀 산언덕에 형의 유해는 묻혔지만 형은 마음속에 되살아났다.
자유와 민주의 세상이 찾아와야 하늘이 내린 인권을 누릴 수 있는 법이라고 하늘나라에서 형은 말했다.
살다 보면 때때로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만난다.
그 바람이 몰고 온 엄청난 사건, 마음의 상처와 충격은 세월이 가도 달라지지 않는다.
꽃 피고 새가 노래하는 사월이 오면 더욱 그리워지는 형. 그날 형을 데려간 사월의 꽃바람은 가슴을 긋는 아픔이다.
그날 비극은 붉은 노을처럼 강렬한 기억으로 머물고 있다. 그러나 형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고귀한 피를 흘려 자유민주의 새 하늘을 활짝 열어놓은 형, 형의 용기 있는 삶과 생생한 기억이 시가 되었다.
형의 혼령이 내게 옮겨와 치열하게 그날을 증언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청소년 서사시집을 내며]
「4시에 멈춘 풀꽃시계」를 읽는 독자에게
예술의 힘이 어떻게 인간의 아픔을 구원하는가라는 물음은 글을 쓰면서부터 줄곧 저를 지배해온 화두입니다.
민족과 역사에 대한 자그만 관심이 이 시집의 출발이었습니다.
‘역사와 현실을 잊는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라는 말도 매번 가슴 속에 울림으로 다가온 말입니다.
어린 날 직접 겪은 뼈 시린 역사를 실존과 현실인식이란 측면에서 동심의 시선으로
증언코자 붓을 들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과 어린 날 체험한 격동의 생생한 현대사가 맞물려 씨앗이 되었고,
그 씨앗이 입 안에 궁글려져 시어가 되었습니다.
기억이 소환되고 응집함으로써 가족사가 되고 다시 강물이 되어 당대 사회와 결합함으로써
도도한 바다와 같은 현대사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서사시집은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를 정밀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면서
결곡하게 자리잡은 흔들림 없는 자유 민주의 가치를 거듭 성찰해보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가족사와 함께 민중이 겪은 시대사를 다룬 서사이기에 서정적 사유와 감성이 작용하여
서사의 줄기에 서정의 잎새와 향기가 짙게 풍기는 경향을 띄기도 합니다.
이른바 서정적 서사시의 특징일 것입니다. 필자의 원래 의도이기도 합니다.
한국 현대사의 변혁을 일궈낸, 굵직한 발자국을 남긴 4·19 혁명은 불의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한
형의 죽음이라는 비극성을 주테마로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한국의 운명을 바꿔놓은 자유와 정의를 향한 국민들의 절규와 절박한 외침소리를 또 하나의 테마로 담아놓았습니다.
자유 민주의 가치가 생명처럼 소중하다는 점을 일깨우고 싶어서입니다.
국민이 권력을 바꾸어낸 위대한 첫 번째 민주혁명으로 영원히 한국 민주주의의 정신적 토대가 될 것임을 믿습니다.
권력이 국민을 위해 씌여져야 함은 동서고금이 수긍하고,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공통 원리입니다.
이 시집을 독재와 불의에 맞서 싸우시다 산화한 모든 영령들께 바칩니다.
<윤삼현·시인>
윤삼현 (지은이)
김천정 (그림)
●이탈리아에서 디자인을 공부했으며 주로 출판물 등에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그린 책으로, 『아껴라 아껴 영감님과 뭐든지 아껴 영감님』,
『의좋은 형제』, 『할미꽃 이야기』, 『한국 대표 동시 100편』, 『뻐꾹리의 아이들·1~6』, 『그냥』, 『목기러기 날다』 등이 있어요.
●서울과 캐나다에서 3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한국어린이도서상 일러스트부문상·아동문학의날 본상을 받았어요.